[남기정의 한옥여담] 한옥의 마당, 비움이 만든 가장 풍요로운 공간

남기정의 한옥여담 칼럼니스트

news@dokyungch.com | 2025-10-20 10:34:16

[도시경제채널 = 남기정 칼럼니스트] 

남기정 칼럼니스트

한옥을 떠올리면 기와지붕, 대청마루, 그리고 나지막한 담장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마당’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집과 집 사이에 남겨진 빈터가 아니라, 그곳은 삶의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는 무대이자, 비워져 있었기에 더 많은 것을 채울 수 있었던 창조의 공간이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의 삶은 집 안에서 시작해 집 안에서 끝났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마당에서 이웃과 함께 축하했고, 농사철이 되면 마당은 곡식을 말리고 탈곡하는 일터로 변했습니다. 생일이면 풍악이 울리고, 잔칫상이 차려졌으며, 가족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장례식 또한 이 마당에서 치러졌습니다. 좁은 온돌방은 기능이 제한적이었지만, 마당은 ‘비어 있었기에’ 어떤 상황이든 품어낼 수 있었습니다. 비움이 곧 무대였던 것이죠.

건축적으로도 이는 흥미로운 발상입니다. 서양의 집들이 방과 홀, 정원을 기능별로 나누어 설계했다면, 한옥의 마당은 무엇을 하든 받아들이는 그릇으로 남겨둔 것입니다. ‘비움’은 곧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마당이 있기에 집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시선은 어떻습니까? 현대 도시에서 마당은 흔히 ‘낭비’로 취급됩니다. 집을 지을 때 조금이라도 더 방을 넓히고, 발코니를 확장해 거실로 만들고, 주차 공간조차 실내 면적으로 환산하는 것이 부동산 시장의 공식처럼 굳어 있습니다. 빈 공간은 ‘쓸모없음’으로 간주되고, 평수는 숫자로만 평가됩니다. 채움만을 향해 달려가다 보니, 정작 우리의 삶을 담아낼 비움의 공간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조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비워둠으로써 채웠습니다. 마당이라는 빈 공간은 때로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때로는 어른들의 쉼터가 되었으며, 때로는 마을의 잔치를 이어주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기능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오히려 모든 기능을 가질 수 있었던 곳. 바로 그 자유로움이 삶을 더욱 풍성하게 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건축적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삶을 바라보는 철학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더 채우는 것’에만 익숙합니다. 넓은 방, 큰 집, 많은 수납공간. 하지만 채움만을 추구하다 보면 정작 우리가 모이고, 쉬고,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은 줄어듭니다. 반대로, 옛 한옥의 마당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래서 더 많이 채울 수 있었습니다. 웃음소리, 노랫소리, 땀방울, 눈물까지. 비움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무한한 창조의 바탕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마당의 가치는 단순히 ‘비워두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구 건축에서 말하는 미니멀리즘이 주로 ‘덜어냄’을 통해 미적 순수성을 강조했다면, 한옥의 마당은 함께 살아가는 관계를 담는 그릇이었습니다. 마당은 덜어냄을 넘어 이웃과 가족이 함께 모이고 어울릴 수 있는 사회적 풍요의 기반이었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즉, 마당은 미니멀리즘의 미학과 닮아 있으면서도, 한 차원 더 나아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비움의 미학’이 아니라, 공유와 관계의 미학이었다. 마당을 통해 이웃과 쉽게 관계 맺을 수 있고, 아이들이 뛰어놀며, 어른들이 함께 일하고 의례를 치르는 장면이 모두 이곳에서 펼쳐집니다. 마당은 결국 개인의 공간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 더 나아가 마을 공동체가 연결되는 사회적 무대였던 것이다.

결국 마당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의 삶에는 비워둔 여백이 있습니까?”
여백 없는 삶은 늘 빽빽하고 효율적일 수는 있지만, 동시에 삭막해집니다. 반대로 조금은 비워둔 삶, 남겨둔 공간은 그때그때 다른 풍경을 열어 줍니다. 마당은 바로 그 비움의 지혜를 전해주는 가장 한국적인 건축적 유산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평수의 크기를 두고 집값을 계산하지만, 선조들은 마당이라는 비움을 통해 삶의 크기를 키웠습니다. 더 채우려는 현대인의 욕망과, 비워두어 더 크게 채웠던 옛사람들의 지혜 사이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묻습니다. “비워야 비로소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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