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정의 한옥여담] ‘담장은 있어도 단절은 없었다’ 한옥마을의 공동체

남기정의 한옥여담 칼럼니스트

news@dokyungch.com | 2026-06-17 14:02:53

[도시경제채널 = 남기정 칼럼니스트] 한옥마을을 걷다 보면 낮은 담장이 집과 집, 집과 골목 사이를 가만히 갈라놓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담장은 마을을 닫아 두기 위한 경계가 아니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를 감싸는 마당은 가장 사적인 공간이었지만, 솟을대문을 나서면 곧 골목길이라는 반(半) 공적인 공간이 이어졌고, 그 골목은 다시 마을 어귀의 너른 마당으로, 그리고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정자나무 아래로 열려 있었습니다. 사적인 공간에서 공적인 공간으로 단계적으로 번져 나가는 이 위계, 그것이 바로 전통마을이 공동체를 길러낸 방식이었습니다. 

남기정 칼럼리스트. 

하루의 노동이 끝나는 저녁이면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큰 나무 아래로 모여들었습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누군가는 텃밭에서 따 온 참외를, 누군가는 갓 쪄낸 감자를 내놓으며 함께 나누었습니다. 혼사가 있으면 함께 기뻐했고, 상을 당하면 함께 슬퍼했습니다.

마을 입구의 우물가와 빨래터 역시 여성들이 물을 긷고 빨래를 하며 마을의 소식과 정을 나누던 또 하나의 공동체 공간이었습니다. 이런 공간들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지만, 모두의 자리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공동체의 공간이 비어 있는 마당 하나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을은 정자목이나 당산목 아래에서 동제와 당산제 같은 의례를 함께 치르며 ‘우리’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다져 나갔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남녀와 노소에 따른 자리의 구분, 성씨와 가문에 따른 위계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암묵적 질서를 통해 서로의 자리를 이해하고 존중했고, 그 절제된 균형 속에서 공동체는 오히려 더 단단해질 수 있었습니다. 위계는 있었지만 단절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떠올려 보면 어떻습니까. 단지는 외부와 단절된 게이트로 둘러싸여 있고, 입구에는 시공사의 브랜드 로고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단지의 이름은 점점 길어지고 화려해지며, 그 이름 자체가 시세를 가르는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초등학생 사이에서 누가 어떤 브랜드의, 어느 입지의 아파트에 사느냐가 자랑거리가 되는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은 우리 주변의 풍경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모여 산다는 것은 원래 부동산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거, 즉 하우징이라는 공간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처음 시작된 자리도 시세와 자산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관계였습니다. 전통마을의 위계적이면서도 열려 있던 공간 구조가 보여 주듯, 좋은 주거 공동체는 평수나 브랜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얼마나 따뜻하게 설계하는가에서 시작됩니다.

물론 오늘날의 아파트 단지에도 커뮤니티센터와 잘 가꾸어진 조경, 휴게공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공간들은 대부분 정해진 프로그램과 정해진 시간에만 작동하는 상업적 시설로 설계돼 있습니다. 누구든 아무 때나 모여 앉아 바람을 쐬고, 간식을 나누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할 수 있었던 정자나무 그늘의 자유로움은 그곳에 없습니다. 화려하게 채워진 커뮤니티시설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비워 둠으로써 누구나의 자리가 되었던 공동체의 마당은 우리 삶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은평 한옥마을. [사진=서울관광재단]

우리가 전통마을의 공동체에서 다시 배워야 할 것은 담장의 형태가 아니라, 그 담장 안에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이어 주던 위계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정자나무 아래에서처럼, 함께 모여 이야기와 의례를 나누며 ‘우리’라는 유대감을 만들어 가는 시간과 장치입니다. 그것은 시공사의 브랜드로도, 평당 시세로도 결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는 이제 대부분 사라졌지만,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사는 동네에는 이웃과 마주 앉아 바람을 쐬고 간식을 나눌 그늘이 남아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자녀에게 자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파트의 이름인지, 아니면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인지 말입니다.

주거의 가치는 결국 자산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깃든 공동체의 온기로 다시 매겨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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